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당신의 취향존중



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구씨는 극 중에서 대사가 거의 없다. 그저 매일같이 땀에                          I REVERE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푹 절은 티셔츠 하나 입고 머리에 먼지를 얹어가며 싱크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대를 만들고 밭일을 한다.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소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주를 마신다. 구씨에게 안주란 없다. 오직 술을 먹는 것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 목적이고 그냥 소주만 마신다. 동쪽 한 번 보고 한잔,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서쪽 한 번 보고 한잔, 남쪽 한 번 보고 한잔. 그런데 서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서히 그 모습에 빠져든다. 밤하늘 별을 안주 삼아 우수에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찬 구씨 눈빛은 ‘구씨를 추앙하라’로 돌아선 결정적 순간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V E R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었다.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E                         E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내가 극 중 미정이가 된 듯한 착각을 느꼈다. 얼굴 붉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R
            나의 추앙일지 드라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기 어려워 대출까지 받아 돈을 빌려줬지만 헤어지고는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E      V E R
            <나의 해방일지> 구씨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돈을 갚지 않는 전 남친과 싸우지도 못하는 미정이. 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R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E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사에서 소소한 스트레스조차 풀 때 없는 그녀가 구씨에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게는 유독 많은 말을 쏟아낸다. 구씨에게는 속에 있는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V E R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말들을 쏟아내며 얼굴을 붉히자 구씨는 툭 “나한텐 잘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E                         E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만 붉힌다”고 내뱉는다. 그러자 미정이 속사포처럼 외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R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친다. “넌 날 좋아하니까.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뭔 짓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V E R
                      남편이 몇 해 전 겨울에 <나의 아저씨>라는 드라마가            을 못 해? 그러니까 넌 이런 등신 같은 나를 추앙해서,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E                         E
                      너무 재미있다며 하도 강권해서 나도 할 수 없이 보았었           자뻑에 빠질 정도로 자신감 만땅 충전돼서, 그놈한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R
                      다. 그리고 푹 빠졌다. 그 <나의 아저씨> 작가인 박해영        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야무지게 할 말 다 할 수 있게 그
                      작가가 작심하고 준비해서 썼다는 <나의 해방일지>가             런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라고. 누가 알까 조마조마하지
                      나타났고 이번에도 남편은 조용히 이불 속에서 스마트             않고 다 까발려져도 눈치 안 보고 살 수 있게 날 추앙하
                      폰으로 정주행을 시작하고 있었다. 그러나 언뜻 지나가            라고!”
                      며 보이는 화면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. 그런데 팀원           그런 미정이 마음이 왜 그런지 알 것도 같다. 아무것도
                      들과 점심을 하던 어느 날 나의 상사가 육개장을 한 숟           뜻대로 되지 않는데, 말 없는 구씨는 그녀의 장단을 맞춰
                      갈 뜨며 <나의 해방일지>를 몰아서 보느라 피곤하다고            주고 있었다. 그래, 내가 구씨를 추앙하기 시작한 건 어
                      했다. 이번에는 옆에서 동료가 오늘 출근길에 <나의 해           쩌면 구씨 같은 든든한 존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아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MR.KOO
                      방일지>를 보며 눈물을 펑펑 흘렸는데 마스크가 있어             닐까. 도대체 멀리뛰기가 뭐라고 구씨가 뛰는 그 순간 설
                      서 다행이었다고 한술 더 뜨는 것이었다. 그날 밤 나는           렘이 폭발할까. 바람에 날아간 미정이의 모자를 가져다
                      마음을 고쳐먹고 애들을 다 재운 새벽부터 넷플릭스로             주기 위해 “기다려” 한마디 툭 던지는 이 남자. 그리고
                      <나의 해방일지>를 정주행하기 시작했다.                   내 옆에 있는 남편. 나는 남편에게 외쳤다. “나를 추앙하
                      처음에는 정말 지루해서 1.5배속으로 봤을 만큼 이 드           라고!” 거기에 남편은 무미건조하게 답한다.
                      라마의 전개는 느렸다. 하지만 전개와 다르게 대사는             “ㅇㅇ 추엉할게 오늘 늦음.”
                      빠르고 극 중 캐릭터들의 감정은 꿈틀거렸다. ‘좋은 일
                      이 있을 거예요’라는 광고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지하
                      철로 출퇴근하는 ‘미정이’의 모습과 대사 그리고 나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write. 배지연 기자 기획실
                      미치게 만든 ‘구씨’가 어느 순간 이야기 속에 뿌리를 내
                      리고 있었다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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